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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전범 히로히토 일왕

전범 재판
연합국은 1945년 11월 시작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인류의 이름으로 독일 나치당과 게슈타포를 범죄집단으로 규정하고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하여 재판을 시작했다. 한편 일본에 진주한 연합국최고사령부(GHQ)는 일본에 대해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하여 도쿄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 [極東國際軍事裁判,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일명 '도쿄재판'을 개정한다. 재판정은 전쟁 당시 일본군 총지휘 본부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현재 도쿄시내 이치가와 기념관으로 사용 중이다.

이 재판소는 1946년 1월 19일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에 관한 최고사령관의 특별성명서'와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총 17조)에 의해 설치되었다. 동 조례 6조에는 전범들의 죄질에 따라 A.B.C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A급 : 침략전쟁에 대한 공동모의, 기습개전에 의한 살인과 잔학행위자 등 평화에 대한 범죄자
B급 : 전쟁 법규를 위반하여 이루어진 살해, 학대, 약탈 등의 통상적인 전쟁범죄자
C급 : 민간인에 대한 살해, 학대, 약탈을 한 비인도적인 범죄자

A급에 해당되는 평화에 관한 죄는 '침략전쟁 또는 국제법·조약을 위배한 전쟁'을 계획·개시·수행하는 과정에서 범한 죄 또는 그 계획·모의에 참가한 개인·단체구성원이 범한 죄로 규정함으로써 이에 해당되는 자들을 중대 전범자로 규정하였다. A급 전범자는 본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서 심리가 이루어졌다. B·C급의 전쟁 범죄인에 대해서는 요코하마, 홍콩, 싱가폴, 마닐라, 괌 등 현지에서도 재판이 이루어졌다. 기소된 자는 약 5,000명에 이르렀고 사형에 처해진 자는 937명이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1946년 2월 18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D.맥아더에 의하여 William.F.Web 재판장(Australia)을 비롯한 10명의 재판관(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소련·중국·인도·네덜란드·필리핀·뉴질랜드에서 각 1명)과 J.B.키난(미국)을 수석검찰관으로 하는 30여 명의 검찰관이 임명됨으로써 발족되었다. 이에 따라서 1946년 4월 29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이하 28명의 피고가 A급 전범자로 정식 기소되었다. 5월 3일부터 이에 대한 심리(審理)가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공정한 재판을 위하여 각 피고인이 선정한 28명의 일본인 변호인단과 2명의 미국측 변호인단이 참가하였다.

A급 전범은 아시아·태평양에의 침략전쟁을 계획·실시했을 뿐 만 아니라 2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일본군의 중요한 위치에 있던 자들로 군의 작전서나 기록, 전쟁 중에 연합국 정부가 송부한 포로 학대에 대한 항의문서 등 많은 증거가 제시되었다.

한편, 피고인들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들의 진술이 일왕이 기소(起訴)되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며 일왕에게 충성을 표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소련과 중국 등 전승국에서 '일왕을 기소하라'는 강경한 요구가 끈질기게 이어졌고, A급 전범으로 기소된 도조가 1차 공판에서 “일본에서 일왕이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일본 국민 누구도 일왕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며 일왕의 전쟁책임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왕을 기소하지 않는다는 내부 방침에 따라 미국과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도조는 그 이후 ‘일왕 전쟁책임론’ 주장을 번복하는 정직하지 못한 사무라이의 작태를 보였다. 

A급 전범 중 우익의 거두이자 도쿄제국대학 교수로서, 아시아침략 전쟁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던 오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 1886∼1957)가 있었다. 그는 재판 첫날부터 내복 차림에 맨발로 법정에 출두했다. 그리고 그는 재판정 바로 앞줄에 앉은 도조 히데키의 대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 히히거리며 미친 듯 행동을 했다. 도조는 오오가와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본심을 알고 있는 듯이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그리고 그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서류를 낚아채는 등의 기행을 일삼자 재판정은 그를 병원으로 이송해서 의사의 검진을 받게 했다. 검사 결과 매독에 의한 '진행성 마비증'으로 진단되어 그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후 면소(免訴)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바로 완쾌되어 석방되었는데 정신이상을 가장해서 재판을 기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오가와는 비열한 3류 사무라이의 전형으로 특별사면 후에는 침략전쟁을 찬미하는 골수 우익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법정은 48년 11월 12일 심리하는 도중에 사망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와 교활하게 정신이상을 빙자한 오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를 제외한 25명에 대하여 전원 유죄를 인정되어 교수형 7명, 종신형 16명, 금고 20년 1명, 금고 7년 1명의 형을 선고하였다.

사형선고를 받은 A급 전범7명은 48년 12월 23일 스가모(巢鴨)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사형된 전범들은 죽어서 묘를 갖지 못했다. 화장해 태평양에 뿌림으로써 전후 처리를 깨끗이 매듭짓는다는 것이 연합군사령부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23일 새벽 도쿄 스가모 형무소 교수대에서 처형된 일곱 전범의 시체는 삼엄한 경비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요코하마 구보야마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아침 일찍 한 줌의 재로 변한 일곱 명의 유골은 곧 수송기에 실려 아시아침략전쟁의 원혼들이 꿈틀거리는 태평양 상공에서 바다에 뿌려졌다. A급 전범들의 유족 누구도 한 조각 뼈를 얻지 못했다고 보도되었다. 

 

비열한 A급 전범 히로히토

일왕 히로히토(裕仁)는 1945년 8월초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결의한  ‘포츠담 선언’을 본인의 안위를 걱정하여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에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었다. 엄청난 국민들의 희생이 뒤따르자 히로히토는 마지못해 항복함으로써 일제의 아시아 침략전쟁은 패망으로 종식되었다.

이에 연합국최고사령부(GHQ)는 전쟁범죄자 처벌을 정한 포츠담선언에 의거해 9월 11일 전쟁 내각의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해 39명에 이르는 전쟁 범죄 용의자들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용의자로 지목됐던 일왕 보좌관 혼조(本上), 1군 총사령관인 스기야마(杉山)는 체포 소식을 듣자 자살했다. 그리고 12월에 내려진 3차 체포령에서는 왕족인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도 용의자로 지목됐다. 그는 37년과 40년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을 역임했고 재임 당시 중일전쟁과 인도차이나 반도 침공을 수행했던 자이다.   

▲근엄한 표정의 맥아더장군과 초라한 모습의 일왕 히로히토

그리고 그는 최초로 히로히토에게 일제의 패인을 자인하고 항복을 건의한 자이다. 그는 출두 당일 아침 자신의 집에서 독약을 먹고 죽은 채 발견됐다. 고노에는 침묵하고 말하지 않겠다는 건지 도쿄재판을 묵살하겠다는 건지 아리송한 ‘묵(默)’이라는 글자 한 자만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사무라이 최후의 선택인 자살을 선택했던 것이다.

폭정으로 유명한 로마의 네로 황제는 “이로써 한 예술가가 죽는구나” 라고 외치며 착각 속에 자살을 선택했고,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의 과오를 자살로 대신했다. 그러나 소위 조작된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제124대 일왕 히로히토는 일본에서 흔하디 흔한 자칭 사무라이 최후의 선택이요, 최후의 영광이라는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비열한 자였다.

히로히토는 히틀러,무솔리니와 함께 2차 세계대전 3대 악당 중 한 사람이다.
히로히토는 살아있는 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본 육해공군의 대원수를 겸임했다. 히로히토는 “일본에서 일왕이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일본 국민 누구도 일왕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도조가 증언했듯이 그는 모든 전쟁과 참혹한 학살의 최정점에 항상 있었다. 히로히토는 인간을 살아있는 상태에서 30여 가지의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실험한 731부대 일명 “악마의 소굴”을 만들었다. 패망 후에는 학살을 담보로 얻은 731부대의 연구물을 기소를 면하기 위하여 미국에 넘겨주는 추악한 거래를 묵인한 자이다. 꽃다운 10대 어린 여성들을 성노예(위안부)로 만들어 영혼을 빼앗도록 지시했다. 가이덴과 가미가제를 통하여 참혹한 죽음을 선택하도록 지시했다. 포츠담선언에 대하여 즉각적인 수용을 거부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일본에 핵무기를 투하하도록 유도하여 수십만의 무고한 시민들이 지금까지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아시아인 2000만 명, 일본인 300만여 명, 미•영 등 연합군 약6만 명의 희생을 강요한 장본인이자, 전세계를 피의 광풍으로 몰아넣은 학살과 피의 화신이었다.

또 히로히토는 동경대학교 코모리 요이치(小森陽一)교수가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한반도가 분단되는 비극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흉이다. 즉 그가 포츠담선언을 즉각적인 수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소련이 참전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반도가 분단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는 일본군국주의의 희생양으로 미화돼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63년 간 ‘살아있는 신(現人神 아라히토 가미)’으로 존재했던 잔혹한 특A급 전범자이자 교활한 기회주의자였으며 비열한 3류 사무라이였다.

이러한 일왕에 대하여 전후 일본의 최대 관심사는 그의 면책이었다. 그들에게 일왕은 곧 국가요, 살아있는 신으로써 절대적 존재였다. 따라서 일본내각은 일왕이 처벌되면 국민 전체가 전쟁범죄자가 된다고 여겼다. 때문에 일왕이 형식적으로 전쟁을 승인했을 뿐임을 주장하라는 절대지침을 내렸다. 비판의식 없는 일본 국민들 역시 일왕을 지키고자 했다.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앞으로 전달된 수백 통의 편지에는 이런 일본 국민들의 심정이 담겨있었다. 이들 편지가 자의든 타의든 조작된 편지이든지 간에 말이다.

연합군 사령부도 이런 일왕을 기소할 것인가가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히로히토는 자구책을 찾아야 했다. 그의 최종 선택은 신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46년 1월 일왕 히로히토는 인간선언 조서를 발표했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 실질적인 통치자가 아닌 상징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비열한 3류 사무라이의 또 다른 선택이었다. 이로써 그는 기소도 면하고 일왕의 자리도 지켰다. 결국 전후 일본의 모든 책임은 군부에 있다는 식이었으며, 이렇게 되기까지 여러 전승국들의 요구에도 묵살하고 고민한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

오늘날까지 일본국민들이 과거를 반성하지 못하고 방자하게 준동하는 것도 미국의 이러한 전후 A급 전범들에 대한 확실한 단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히로히토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은 벚꽃을 든 일본만 보았지 숨겨진 악마의 사시미칼을 보지 못한 우를 범하고 말았다.

2004년 일본은 이렇게 비굴한 삶을 살다간 일왕 히로히토를 기리기 위하여 도쿄 다치가와(立川)시에 있는 쇼와(昭和)기념공원 내에 ‘쇼와일왕 기념관’을 건립했다. 또 현재 식목의 날인 4월 29일을 ‘쇼와의 날’로 바꾸는 법안을 통과시켜 과거 세계를 피로 물들게 했던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고 있다. 이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사설을 통해 “4월 29일을 ‘격동의 쇼와’를 가슴에 새기는 날로 삼자”고 얼빠진 주장을 했다.(쇼와:히로히토 재임기간의 연호)
그리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존재로 믿고 있다. "히로히토의 성단(聖斷)에 힘입어 평화가 정착되었고, 일본 경제 부흥을 이루었다고"


A급 전범 명단 (교수형)

도조 히데키(Hideki Tojo 판결시65세) 
도쿄출신.수상,육군 대장,참모 총장.소화 10년 관동군 헌병 사령관,동 12년 관동군 참모장,동 13년 5월부터 12월까지 고노에 내각의 육군 차관,동 13년부터 14년까지 육군 항공 총감,동 15년 7월부터 16년 10월까지 고노에 내각의 육군 장관,같은 해 10월로부터 19년 7월까지 국무총리.관동헌병대 사령관 시절 '면도날 도조' 로 불림. 일제가 군부독재. 파시스트화하는데 일등공신  (판결이유)소화 16년12월8일,하와이(Hawaii)진주만을 불법 공격,미국 군대와 일반인을 살해한 죄.

무토 아키라(Akira Muto 판결시57세) 
구마모토출신 육군 중장,육군생 군무 국장.소화 14년10월부터 17년 4월까지 육군생 군무 국장,동 18년 재 수마트라섬(sumatra) 제2사단장,동 19년 10월 재 필리핀(Philippines)2군 14 방면군 참모장.
(판결이유)포로 학대의 죄

이타가키 세이시로(Seishiro Itagaki 판결시64세)
이와테출신. 육군 대장,중국 파견 군총 참모 장.소화 11년부터 12년까지 관동군 참모장,동 13년6월부터 14년 8월까지 고노에,히라누마량 내각의 육군 장관겸 쓰시마 사무국 총재,동 14년7월 중국 파견군 참모장,동 16년7월부터 20년까지 조선 군사령관,동 20년4월 싱가포르(Singapore) 제7방면 군사령관.
(판결이유) 중국 침략,미국에 대한 평화의 죄.

마쯔이 이와네(Iwane Matsui 판결시71세)
아이치출신. 육군 대장,상해 파견 군사령관. 소화8년 육군 대장,같은해 대아세아 협회 창립자의 1인,동 12년 10월부터 13년 2월까지 중지나 방면 군사령관,동 13년 7월부터 15년 1월까지 군사 참의관.난징(南京)대학살 책임자. "난징사건은 정말로 부끄럽다. 황위(皇威)를 떨어뜨렸다" 는 말을 남김
(판결이유)「포로 및 일반인에 대한 국제법 위반(남경대학살)」

기무라 헤이타로 (Heitaro Kimura 판결시61세)
사이타마출신. 육군 대장,버마(Burma)파견 군사령관.소화 15년 관동군 참모장,동 16년부터 19년2월까지 고노에,동조 내각의 육군 차관,동 19년 버마(Burma)방면 군사령관. 별명 '버마의 도살자'
(판결이유)영국에 대한 전쟁 시작의 죄

도이하로 겐지(Kenji Doihara 판결시65세)
오카야마출신.육군 대장,아리마로주 특무기관장.소화6년 아리마로주 특무기관장,동8년 관동 군사령부 부,화북 자치 정부 최고 고문,동 13년부터 15년까지 만주 주둔 제5 군사령관,16년 육군 항공 총감,18년 동부 군사령관,19년부터 20년까지 싱가포르(Singapore)제7방면 군사령관. 자칭 '동양의 로렌스'
(판결이유)중국 침략의 죄

히로타 고키(Kouki Hirota 판결시71세)
후쿠오카출신.주 소련 대사,외상,수상.소화5년 주소 대사, 동8년 9월부터 9년 7월까지 사이토 내각의 외무 대신,같은 해7월부터 11년 3월까지 오카다 내각의 외무 대신,동 11년 3월부터 12년 2월까지 국무총리,동 12년 6월부터 13년 5월까지 고노에 내각의 외무 대신,동 15 년내각 참의.
(판결이유) 소련.중국에 대한 침략전쟁 책임자 .아시아침략전쟁에 이른 일본의 침략 정책 작성 죄



A급 전범 명단(기타)

가야 오키노리 (Okinori Kaya 57세)
히로시마출신. 재무장관. 소화 12년 6월부터 13년 5월까지 고노에 내각의 대장성 장관,동 14년부터 16년까지 화북개발회사 총재,동 16년 10월부터 19년 2월까지 동조 내각의 대장성 장관.(판결)종신 금고

고이소 구니아키 (Kuniaki Koiso 66세)
산형출신. 육군 대장,조선 총독,수상. 소화5년 육군생 군무 국장,동7년부터 9년까지 관동군 참모 장,동10년부터 11년까지 조선 군사령관,동 14년 히라누마 내각의 척무 장관,동 15년 요나이 내각의 척무 장관,동19년 7월부터 20년 4월까지 총리 대신.(판결)종신 금고

도고 시게노리 (Shigenori Togo 64세)
가고시마출신. 주독,주소 대사,외상. 소화 12년 주독 대사,동 13년 주소 대사,동 16년 10월부터 17년 3월까지 동조 내각의 외무 대신 및 척무 장관. (판결)금고20년

미나미 지로 (Jiro Minami 72세)
육군 대장,조선 총독. 소화4년 조선 군사령관,소화6년 4월부터 12월까지 와카쓰키 내각의 육군 장관,소화9년부터 11년까지 관동 군사령관,동 11년부터 17년까지 조선 총독,동 17년부터 20년까지 추밀원 고문 관. (판결)종신 금고

사토 겐료 (Kenryo Sato 51세)
이시카와출신. 육군 중장. 소화 16년 2월부터 17년 4월까지 육군생 군무국 군무 과장,동 16년 육군 소장,동 17년 4월부터 19년 12월까지 육군생 군무 국장,동 20년 육군 중장. (판결)종신 금고

스즈키 다이치 (Teiichi Suzuki 58세)
치바출신. 육군 중장,기획원 총재. 소화 13년 12월부터 16년 4월까지 코아원정무 부장,동 16년 4월부터 18년 10월까지 고노에 내각의 기획원 총재 가네쿠니무 장관,동 18년 11월부터 19년 9월까지 동조 내각의 고문. (판결)종신 금고

시게미쯔 마모루 (Mamoru Shigemitu 59세)
주영 대사,외상. 소화 6년 주화 대사,동 11년 11월부터 13년 11월까지 주소 대사,동 13년부터 16년 6월까지 주영 대사,동 18년 4월부터 19년 7월까지 동조 내각의 외무 대신,동 19년 7월 부터 20년 4월까지 고이소 내각의 외무 대신겸 대동아 장관.(판결)금고 7년

시라토리 도시오 (Toshio Shiratori 59세)
치바출신. 주이 대사. 소화 5년 외무성 정보부 장,동 14년 주이 대사,일독 이소국 동맹의 주인공의 1인,동 15년 외무성 고문,동 18년 익찬 정치회 총무,(판결)종신 금고

시마다 시게타로 (ShigetaroShimada 63세)
도쿄출신. 해군 대장,해군 장관,군령부 총장. 소화5년 연합 함대 참모 장,동 10년부터 12년까지 해군 군령부 부장,동 12년 제2 함대 사령 장관,동 15년 중국 방면 함대 사령 장관,동 16년 10월 동조 내각의 해군 장관,동 19년 2월부터 7월까지 해군 군령부 총장. (판결)종신 금고

아라키 사다오 (Sadao Araki 69세)
도쿄출신. 육군 대장 .소화6년 12월부터 동9년 7월까지 이누카이 내각,사이토 내각의 육군 장관,소화 13년 5월부터 동 14년 8월까지 고노에 내각 및 히라누마 내각의 교육부 장관. (판결)종신 금고

오오시마 히로시 (Hiroshi Ohsima 60세)
기후출신. 육군 중장,주독 대사. 소화 11년 베를린 대사관부 무관,동 13년 10월부터 20년 4월까지 주독 대사,일독 이소국 동맹의 체결에 활약,육군 중장. (판결)종신 금고

오카 다카즈미 (Takazumi Oka 56세)
도쿄출신. 해군 중장,해군생 군무 국장 소화 15년부터 19년까지 해군생 군무 국장,동 17년 해군 중장,동 19년 고이소 내각의 해군 차관,19년 9월부터 20년 6월까지 진해(조선)경비부 사령관. (판결)종신 금고

우메즈 요시지로 (Yoshijiro Umezu 64세)
육군 대장,관동 군사령관. 소화6년 육군생 군무 국장,동9년 중국 주둔 군사령관,동 11년 3월부터 13년 5월까지 히로타,림,고노에 내각의 육군 차관,동 14년부터 19년까지 관동 군사령관겸 주만대사,동15년 육군 대장,동 19년부터 20년까지 참모 총장. (판결)종신 금고

호시노 나오키 (Naoki Hoshino 54세)
도쿄출신 만주국 총무 장관,내각 서기관 장. 소화 11년 12월 만주국 총무 장관,동 15년 7월부터 16년 4월까지 기획원 총재,동 16년 10월부터 19년 7월까지 토조우 내각 서기관장 및 국무 대신. (판결)종신 금고

하시모토 긴고로 (Kingoro Hashimoto 56세)
후쿠오카출신. 육군 대령. 소화 12년 영국함「레디파도」,「파네」량호를 격파하여 국제 문제를 일으키다,복원후 적성회를 조직 15년 대정 익찬회 창설자의 1인,혁신적 청년 장교의 우두머리. (판결)종신 금고

하타 순로쿠 (Shunroku Hata 67세)
도쿄출신. 원수,육상 중국 파견군 총사령관. 소화 10년 항공 본부장,동 11년부터 12년까지 대만 군사령관,동 12년 8월 교육 총감,동 13 연중지 파견군 최고 사령관,동 14년 8월부터 15년 1월까지 아베 내각의 육군 장관,동 15년부터 19년까지 중지 파견군 최고 사령관. (판결)종신 금고

히라누마 기이치로 (Kichiro Hiranuma 79세)
오카야마출신. 수상,추부 의장. 대정 15년 구니모토사를 창설하고 그 총재로 취임,소화5년부터 11년까지 추밀원부 의장,동 11년부터 14년까지 추밀원 의장,동 14년 1월부터 8월까지 국무총리,동 15년 고노에 내각의 국무 대신.(판결)종신 금고

키도 고우이치 (Kouichi Kido 57세)
도쿄출신. 문부대신. 내무 대신. 후생 대신. 내대신. 소화 12년 고노에 내각 교육부 장관,동 13년 제 2차 고노에 내각의 후생 장관,동 14년 히라누마 내각의 내무 행정 장관,동 15년부터 20년까지 내대신,천황 측근의 최고 책임자로서 중신회의를 주재
(판결)종신 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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