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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 조작


고구려(高句麗)의 등장
서길수 고구려연구회회장은 고구려의 위대성을 ‘고구려 705년’이라는 한마디 말로 대신했다. 이는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들이 500년 이상 지속된 역사를 가진 우리에겐 크게 놀랠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은 진한시대 이후 3백 년 이상 지속된 나라가 송나라(320년) 뿐이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중국 역사가들의 눈에는 고구려 705년 역사란 경이로움의 대상이자 위대함 그 자체인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7세기경 통일된 일본열도는 일왕이 직접 정치를 담당했던 것은 헤이안(平安794~1192) 시대까지이다. 그 이후 실질적인 권력은 막부에 있었다. 이러한 일본에 있어 500년 이상 정권이 지속된 경우는 없었다.

고구려가 가장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한 시기는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과 장수태왕(長壽太王) 때의 시기로 볼 수 있다. 일례로 494년 12월 장수태왕이 사망하자 중국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는 “오호, 슬픈 일이로다. 내 직접 문상하지는 못하나, 이곳에서라도 애도의 뜻을 표하고자 하니 동교(東郊)에 제단을 마련하고 상복을 준비하라.” 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고구려는 4세기부터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주위 국가들을 복속시켜 조공을 받았으며 고구려식 천하관(天下觀)과 세계관을 확립해 나갔다. 중국 수(隋)나라 문제(文帝)는 598년 30만 대군을 이어 612년 양제(煬帝)는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에 패퇴하여 결국 나라가 멸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를 세운 태종(太宗)도 처음에는 막강한 고구려에 굴욕적인 화친을 제의하는 정책을 펼쳤다. 당태종은 이어 군사력을 재정비한 후 직접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이어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을 맞이한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렇듯 고구려는 명실공히 동아시아 최강의 맹주 국가였다.

고구려는 내분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10배가 넘는 중원에 한번도 패하지 않는 웅혼한 국가였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총 2만여 개에 달하는 고구려 고분 중 무용총,각저총,수산리고분,안악3호분,장천1호 등 100여 개의 고분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세계최초로 발명된 겨울철 등산용 아이젠의 기원을 말해 주는 신바닥에 쇠못이 나와 있는 쇠못신이 등장한 .. 수박치기.칼놀이.씨름.공던지기.곡예 등 생전의 생활상을 자세히 그린 역동적인 장면. 서양인과 수많은 악기가 등장하여 국제적인 국가였음을 증명한다. 독특하고 웅장한 스케일에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용맹스러운 자태는 그 어떤 벽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화가이자 미술사가인 근원(近園) 김용준은 [조선미술대요]에서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동양 제1의 그림이다. 고구려 벽화를 보고 있으면 한 폭의 그림을 대하는 맛보다 쏟아지는 폭포 앞에 선 것처럼 신비스러운 박력을 느끼게 된다"라고 흥분했다. 그리고 북한 남포시에 소재하는 덕흥리고분에서 보이는 벽화는 프레스코(Fresco)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기법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첨단기법이라고 한다.

고구려왕은 ‘태왕(太王)’이라 칭했다
고대 최고 군주에 대한 호칭으로 여러가지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건국신화 3황5제에서 ‘황'과 '제'’를 떼내 황제(皇帝)라고 진시왕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7세기말 신라에 패한 백제인들이 세운 일본은 조작된 일본서기에서 ‘천황(天皇)’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중국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을 살펴보면 군주의 호칭에 대한 차이를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땅과 곡식의 신)에 제사 지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천자란 하늘과 땅이 결합하여 탄생하였기 때문에 어버이인 천지에 제사 지낼 수 있지만 제후국(諸侯國)의 왕은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없고 오로지 땅의 신에만 제사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자와 제후국 왕의 차이를 제사 의식을 통해 정의한 동아시아 정치질서다. 그 권위의 차이는 글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황제’ 대신 ‘왕 중에 왕’이란 뜻인 ‘태왕(太王)’이란 호칭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1. 광개토태왕비는 물론이고 신라 왕릉급 호우총(壺塚)에서 발견된 청동호우, 광개토태왕릉 근처에서 발견된 청동방울 등에 새겨진 ‘太王’이라는 명문이 이를 증명한다
2. 군주의 권위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연호(年號)는 중국과 다르게 독자적으로 사용했으며(광개토태왕의 연호는 영락-永樂),
3. 태왕국 고구려는 당당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 증거로 중국 지안(集安)시에 만2천여 개에 달하는 고구려 관련 고분(古墳)들이 있다. 그 중 왕릉급 고분들은 대부분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능(陵) 정상에 올라 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능 정상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당(祠堂)이 있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태왕국으로서 하늘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중국보다 더 진보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4.수많은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는 천체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대 별은 천자만의 연구 대상이었다. 일본 아스카무라(明日香村)의 기토라(キトラ) 고분에서 세계 최고의 천체도(天體圖)가 발견되었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 천체도는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관측된 별자리를 토대로 제작한 것이었다. 결국 이 천체도는 고구려 것이었다. 이는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태왕'이라는 호칭은 삼국사기는 물론 어떤 중국의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사대주의 사고에서 출발한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이라고만 했다.

고구려에 대한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중국의 역사에서는 '태왕'이라는 호칭을 단지 '왕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변질시켰다. 중국 역사서에는 아예 '담덕(談德)'이란 개인 이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역사란 올바르게 평가하여야 하고, 진실은 있는 그대로 놓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고구려 군주에 대한 호칭은 '왕 중에 왕'이라는 뜻을 가진 ‘태왕’이라 부르기로 한다. ‘태왕’으로 복원이야말로 고구려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역사서다

광개토태왕비는 약1600년 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현재 압록강에서 약1km지점인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다. 이곳 지안현 일대에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 (391∼413), 제 20대 장수(長壽)태왕(413∼491)의 능을 비롯한 고구려 관련 고분만 만2천여 개가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비는 광개토태왕 사후 2년째 되는 서기 414년 장수태왕이 만들었다. 자신의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비좌(받침대)와 가첨석(蓋石)가 없이 비신(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비는 묘호(廟號)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국토를 넓혔다는 의미인 광개토를 싫어하여

▲‘辛卯年 好太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방울

마지막 3글자만 사용하여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

광개토태왕(영락태왕)비는
1. 아파트 3층 높이에 달하는 높이 6.39m, 너비 1.5m, 두께 l.53m의 거대한 사면석비(四面石碑)다.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학자들은 그 가운데서도 광개토태왕비가 가장 큰 석비로 규정하고 있다.
2. 현존하는 우리역사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사기보다 700여 년이 앞선 것이다.
3.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은 위에서 아래로 세로선을 긋고 각 행은 약 13㎝ 간격으로 가는 가로선을 그었다.
4. 필체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장한 필체로 14∼16㎝ 정도 크기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다.
5. 4면에 총 44행(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에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혹은1,775)자가 년도별로 기록하는 기년식(紀年式)으로 새겨져 있다.
6.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534자이며 상고사(上古史) 중 특히 삼국,연(燕),부여(夫餘),왜와의 관계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금석문(金石文) 이다.

내용은 크게
1. 제1면1행에서 6행은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신화 및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 등 3대의 태왕위 계승과 광개토태왕의 행장(行狀)에 대해 간략히 기술
2. 제1면 7행에서 제3면8행은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이후의 대외 정복사업을 연대순(紀年式)으로 기록
3. 제3면 8행에서 제4면 9행은 능(陵)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묘를 지키는 사람들(守墓人)의 숫자와 그 출신지 및 수묘 지침, 그에 관계된 令이 새겨져 있다.


광개토태왕비 발견

고구려가 내분에 의거 황망스럽게 지구상에서 사라지자 이 지역은 발해에 이어 금과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들이 차지하였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들은 이 지역을 나라의 발상지라 여기면서 신성시하였다. 이러한 청나라는 만주지역에 대하여 봉금(封禁)정책 즉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1880년을 전후하여 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하여 회인현(懷仁縣)을 설치하면서 봉금정책을 해제하였다. 이 비는 1882년 9월경 청나라 농부가 이 비를 휘감고 있던 이끼.덩굴 등을 불로 태우는 등 농지 개간 중에 발견하였다고 한다. 1,200여 년 간 잊혀져 왔던 거대한 고구려의 태왕비가 한 농부에 의거 발견된 것이다.

그 동안 태왕비의 존재를 나타내는 기록들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비롯한 지봉유설(芝峰類說) 등 조선시대의 문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비가  태왕의 훈적비(勳績碑)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이 비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비(始祖碑)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 비에 대하여 광개토태왕의 혼을 불어 넣은 것은 이 비의 원래 주인 한국도, 토지 소유자인 청나라도 아닌 바로 일본이었다.

태왕비가 발견된 시절 일본의 실정을 살펴보면. 일본은 메이지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득세하던 시절이다. 그들은 비열한 정권 찬탈에 대한 그들의 치부를 숨기고, 혼미스러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적들의 눈을 외부로 돌리기 위하여 정한론을 외치는 등 대외 침략정책을 기조로 삼았다. 국민들을 다잡기 위해서는 조작된 일본서기를 경전으로, 일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섬기는 황국사상을 조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은 우선 한반도를 집어 삼키기 위하여 ‘임나일본부’, ’칠지도’ 등을 조작하여 한반도=야만.미개,일본= 세계 최우수 민족이라는 이론적 토대를 조작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역사학자.언론을 총동원하고 있었고, 주변국들의 정세를 염탐하기 위하여 스파이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주도했던 '조선낭인'을 만주와 중국에는 청일전쟁을 대비한 '대륙낭인'들이었다.

공교롭게도 태왕비가 발견되자  이 지역을 정탐하고 있던 대륙낭인들 중 일본육군참모본부 소속 중위 사코 가케아끼(酒勾景信)라는 자와 최초로 조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코는 태왕비의 탁본을 최초로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로써 태왕비의 정체가 세상의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 비가 조작의 귀신 일본의 손에 먼저 들어감으로써 1500년 전 동아시아의 역사는 실타래처럼 뒤엉키게 되었다.

광개토태왕비는 일본이 조작했다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는 1972년 방위청 전사실(戰史室)에 남아 있는 사료 등을 통해 최초로 탁본을 가져온 사람이 사코이며 그는 중국인으로 변장한 뒤 안에 칼을 넣은 지팡이를 들고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밀정이었다고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 재검토를 위한 서장>에서 밝혔다. 그리고 사코가 가져온 탁본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탁본과 달리 비문에 종이를 대고 문자 둘레에 선을 그린 다음(雙鉤) 그 여백에 묵을 넣어(加墨) 탁본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육군참모본부 사코가케노부의 밀파명령서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같은 학자는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라고도 하며 일명 사코(酒勾)본이라고도 함. 이 탁본은 현재 도교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던 육군참모본부는 1882년 이미 임나고[任那考]를 편찬하면서 고대 한반도 남부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이미 조작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코가 가져온 태왕비 탁본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육군참모본부는 태왕비 탁본에 의거 일본서기의 허구성이 밝혀지자  태왕비를 비밀리에 조작하기 시작했다.

참모본부는 5년 간 비밀스럽게 태왕비 여러 곳을 3차례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조작 작업을 마친다. 참모본부는 1889년 국수주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 5집에 태왕비 해독의 중심 인물인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및 ‘비문지유래기(碑文之由來記)’ 등을 통해 내용을 공개했다.

공개된 내용 중에서 오늘날까지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은 제1면 8행째부터 9행에 걸친 신묘년(辛卯年) 기사이다. 즉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이라는 내용이다. 참보본부와 요코이는 이 기록을 ‘………신묘년에 倭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임나,신라를 격파하여 속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은 고대일본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 간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고 조작된 일본서기에 나타나 있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의 결정적인 또 하나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본열도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라는 자는 '이 비문에 의해 일본이 조선남부를 지배했음이 확실해졌다며 광개토태왕비를 일본에 가져와 박물관이나 공원에 세우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일제는 조작한 태왕비를 영원히 역사를 조작하기 위하여 러일전쟁 후 일본 도쿄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1907년 5월 압록강변에 군함을 배치시키고 오자와(小澤德平) 육군대좌를 만주로 파견 지안현(集安縣) 지사 우광궈(吳光國)와 협상을 벌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때부터 태왕비는 칠지도. 일본서기와 더불어 삼각편대를 이루어 임나일본설을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제는 왜가 고구려에 패함으로써 대륙 진출에 실패한 교훈을 삼아 한반도 강점을 위하여 더욱 분발하도록 독려했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이 비(碑)을 현지 답사한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만주인 영자평(英子平)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다. “비가 오랫동안 풀숲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禧)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빼앗은 글자는 중국인들이 모두 도부(刀斧)로 쪼아 내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적(眞的)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이 첨가된 것 같습니다.” 이는 일본인들이 조작했음을 최초로 암시하고 있다.

조작된 역사는 진리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자 태왕비에 대한 재해석과 조작된 사실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비에 대한 재해석 불을 지핀 것은 1955년 정인보(鄭寅普)의 논문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이다. 그리고 1966년 북한의 박시형(朴時亨)의 <광개토왕릉비>, 김석형(金錫亨)의 <초기 조일관계연구>가 뒤를 이었다.

이들은 이 논문에서 來와 渡海 사이를 끊어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고, 이에 대항해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넜다"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이 비가 광개토태왕의 훈적비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태왕을 주체로 삼아 해석한 것으로 도해의 주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라는 주장이다. 또 破와 百殘 사이를 끊어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고 해석했다. 그 아래는 백제를 주어로 삼아 왜와 통했던 백제가 신라를 토벌했다고 해석했다.

어쨌던 그 동안 임나일본부설을 굳게 믿고 있던 일본역사계와 동아시아 역사 전반에 걸쳐 핵폭탄 투하와 같은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72년 4월 22일 일본 요미우리신문 사회면은 ‘광개토왕의 비문 바뀌치기?:육군참모본부가 위조하여 가져오다(廣開土王の碑文すりかえ?: 僞造して陸軍持ち歸る)’라는 헤드라인으로 광개토태왕비문이 조작되었다는 재일사학자 이진희(李進熙)씨의 <광개토왕릉비의 수수께끼>라는 연구 논문이 실렸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영혼이 조작된 일본역사에 의거 살인과 피로 물들게 했던 또 하나의 증거로 제시됐던 것이다. 인류역사상 용서할 수 없는 일본의 죄상이 세상에 밝혀진 것이다.

재일사학자 이진희씨가 비문조작설을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사코가 가져온 최초의 탁본은 선명하지만 그 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탁본들은 선명하지 않아 해독하기 어렵다. 1900년경 이후에 뜬 탁본은 다시 읽기 쉽게 선명하다.
2. 1913년 실시됐던 첫 학술 조사 결과 비석에 석회가 마구 칠해져 석회가면(石灰假面)을 둘러쓴 듯한 상태였다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보고에 착안해서 볼 때 사코의 탁본은 석회를 바른 뒤에 탁본을 떴기 때문이고, 그 후의 탁본은 석회가 벗겨져 떨어졌기 때문에 선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석회를 발라 선명한 탁본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3. 1905년 최초로 민간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실물을 조사하기 이전까지 현장을 조사했던 일본인들은 모두 군 관계자였다는 점.
4. 사코의 위조가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군은 석회 도포 작전을 벌인 것이라 추측했다.
5. 그리고 이진희씨는 일본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편년체(編年體)로 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가. 비문이 재발견된 것은 통설과는 달리 1880년이며 비문에 붙은 이물질은 1882년 9월에서 12월 사이 소거작업에 의해 비면이 노출되었지만 표면이 벗겨지고 떨어져나가 비문이 선명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 최초에는 일본 밀정 사코 가케노부가 쌍구가묵본을 만들고 1887년 처음으로 탁본(拓本)이 작성되었다.
다. 탁본된 원석탁본(原石拓本)이라는 수곡(水谷)탁본에는 ‘도해파’라는 글자가 없다. 1900년경 비 전면에 석회가 칠해져 쌍구본을 보강하여 비문이 재현되었다.
라. 석회를 칠한 직후의 탁본은 북경의 금석학자 양수경(揚守敬)本과 나이토(內藤)本이다. 사코가 가지고 온 것 이후에 만들어진 탁본들의 글씨체가 각각 일정하지 않다.
마. 1907년 4월 프랑스 동양학자 샤반느(Eduard Chavannes)가 봉천에서 입수한 탁본은 비문의 일부가 수정되거나 새로이 추가되어 탁본된 1905년 이전 작성된 탁본이다.(샤반느 탁본에는 양수경 탁본에 없는 "安羅人戍兵" 뒤에 나오는 "滿"자가 추가된다)
바. 이는 일본참모본부는 3차례에 걸쳐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고, 1930년 후반에 들어 석회가 벗겨져 떨어지기 시작하자, 신묘년조의 래도해파(來渡海破)의 해(海)가 다른 글자로 변하는 등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진희씨의 태왕비 조작설 주장은 동아시아 학계에 그야말로 메가톤급 핵폭풍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주장은 석회를 칠한 것은 자획이 선명한 탁본을 만들기 위한 탁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물에 보존 처리를 위한 조치도 아닌 왜의 활동을 조작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했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대한 중대한 범죄 행위다. 일제가 석회 도부를 했다 안 했다에 대한 진위여부를 떠나 석회를 바르고 나서 작성된 것으로 의심되는 탁본에 의거 이뤄졌던 연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하여 동아시아 역사 학계에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가 거세게 진행되었다.

선문(鮮文)대학 이형구(李亨求)교수는 사코본과 이후에 발견된 탁본을 비교했다. 신묘년조 첫 글자 왜는 원래 後자이고, ‘래도해’는 ‘不貢因’ 이였으며, 지워진 부분의 글자는 왜구신(倭寇新)이라고 했다. 해석을 하면 ‘그 후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가 백제왜구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이자 서예가인 김병기는 글씨체를 통하여 조작 행위를 밝히고 있다. 그는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라는 저서를 통해 ‘渡海破’의 글씨체가 태왕비에 나오는 또 다른 ‘渡’, ‘海’, ‘破’의 글씨체와 다르다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의 글씨체는 기본적으로 정사각형꼴의 예서체이다. 그러나 문제의 세 글자는 획의 선과 위치, 글자의 기울기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渡海破’의 세 글자를 비문의 다른 글자들과 중첩시켜 비교한 결과 원래 ‘入貢于(입공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럴 경우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줄곧 조공해 왔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에 백제와 ○○와 신라에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일본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한편 이진희씨의 주장에 이어 일본에서는 1972년 일본학자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참모본부의 밀정이었다고 방위청 자료를 통하여 폭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사 연구의 대가인 하타다 타카시(旗田巍) 동경都立大 명예교수는 1972년 6월 3일자 요미우리신문에 ‘위조의 사상적 의미’라는 글을 통해 광개토태왕비문에 관한 사상사적 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1974년 10월 <古代朝鮮と日本> ‘광개토왕릉 비문의 여러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논쟁의 상황을 보면 새로운 불안이 일어난다. 원래 광개토태왕릉의 비문 문제는 고대 조.일 관계사에 대한 일본 학회의 전통적인 시각.조선 침략을 긍정.지지한 일본 근대 사학의 체질을 비판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이진희씨는 일본 근대 사학의 체질을 비판하면서 광개토태왕릉비의 변조 문제를 추긍하였다. 그런데 이진희씨에 대한 반론에는 그런 기본 문제에 대한 배려가 없다. 다만 변조의 유무에 한해 반대를 외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광개토태왕릉 비문의 쌍구본. 탁본.석문.사진 등의 편년 체계야말로 문제의 초점이다. 이것은 누구든 인정하는 것이고, 이진희씨의 연구가 가장 높이 평가받는 점이기도 하다. 비판하는 측은 그런 점에 대한 추궁에 소홀했다고 생각한다. 편년체계의 타당성, 더욱이 편년체계와 사코가 바꿔치기 했다는 주장간의 논리적 관련성에 관해 더욱 깊이 파고들어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에마 마사아키는 <대왕의 세기(大王の世記) 1973.12월>에서 “ 3,4세기 ‘임나’가 일본의 속령이 되어 거기에 ‘일본부’를 두고, 군사 및 외교상의 총독부가 있었다는 이제까지의 많은 견해 또한 반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일본인 연구자에 의한 비문의 해석에서 왜를 논증없이 야마토조정(大和朝廷)으로 간주하고, 이 비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가 확실히 존재했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지나친 해석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나오키 코지로(直木孝次郞) 大阪市立대학교수는 1974년 1월 21일 요미우리신문 ‘호태왕비의 수수께끼(好太王碑の謎)’에 대한 서평을 통해 “사코가 비문을 변조했다는 주장과 참모본부가 석회를 칠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입증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도 이렇게 지적했다. “의문을 품을 여지가 있는 각종 탁본의 검토를 게을리 해온 일본학회에 대한 이진희씨의 비판은 창피하지만 솔직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의식 저변에 이진희씨가 말하는 왜곡된 조선관이 조금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조.일 관계사는 많이 잘못되었고, 기기(記紀)비판이 불충분하게 끝났다는 이진희씨의 지적은 올바르다. 일본고대사에는 근본적으로 다시 고쳐 써야 할 부분이 있다. 나는 이런 오류가 일본인이 지닌 역사관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 學習院大學 교수는 <역사와 지리(歷史と地理) 1973.12월>에 기고한 ‘호태왕비를 둘러싸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진희씨도 말한 바와 같이 일본측에 의해 석회가 발라져 새롭게 비석 문자가 새겨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비석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조선.중국.일본 등 적어도 3국 학자들에 의한 국제적 학술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淸) 京都大學 명예교수는 1974년 3월 ‘현대의 눈(現大の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고대사학자는 거의 모두 당신의 위조설을 비난하고, 그렇게 위조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당신이 이데올로기적 예단을 가지고 거기에 맞추어 무리하게 추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논자도 참모본부의 군사 밀정이 비문을 일본에 가지고 온 것, 참모본부에 의해 해독이 극비리에 이루어진 것, 그리고 그것이 전쟁 준비의 일환이었다는 것, 또 지금 일본에 있는 많은 종류의 탁본과 가묵본이 원래의 비문이 아니라는 것, 이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탁본들이 원래의 비문과 다른 것을 탁공의 실수라고 추론합니다. 물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간접적인 상황 증거도 없습니다. 단지 참모본부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든가, 일개 군인이 그런 일을 벌일 수 없다고 독단적으로 말할 뿐, 당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습니다.”(삼인출판사 ‘해협’ 참조)



▲1894년 사코本

▲1900년 나이토本

▲1907년 샤반느本


그러나 태왕비 변조설이 힘을 얻어갈 무릎 일본열도는 또 다시 들쥐 떼와 같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1984년 <호태왕비연구>를 발표했던 중국의 왕건군(王健群)은 1985년 일본에서 열린 심포지움에서 “광개토태왕비문은 조작되지 않았다”라고 발표했던 것이다. 이 심포지움에서 왕건군은 “사코와 일본참모본부가 비문을 고쳤다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 당시 탁본을 만들려면 한 달이 걸린다. 스파이가 한 달씩 머물면서 만든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당시 청의 상황이 엄중해서 이런 일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한 반론을 차치하더라도 일본의 반응은 그야말로 대대적인 환영 일색이었다. 이러한 일본에 있어 역사조작에 대한 반성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일본이 역사조작에 대한 수치심의 반발인가 아니면 근원적으로 역사조작에 취미가 붙은 것일까? 일본의 이러한 치졸한 작태는 1999년 태왕비 적외선 촬영한 결과 석회가 여러 곳에 도부되어 있음이 확인되어 반성하지 않는 일본으로 하여금 또 한번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종합에 볼 때 광개토태왕비는 분명 일본이 조작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일본은 지금까지 시정하지 않고 일본인들에게 조작된 역사를 강요하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 <신 일본사> '조선반도 진출' 항목을 보면 “… 4세기에 들어오자 야마토(大和)정권의 세력은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아직 소국가군 상태에 있었던 변한을 영토로 삼고, 이곳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으며, 391년에는 또다시 군대를 보내 백제•신라도 복속시켰다. … '지배와 출병'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사료가 바로 조선족 선조의 묘에 쓰인 금석문이다. 391년 일본의 조선 출병(出兵)은 지금도 중국 동북부에 남아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호태왕)비에 쓰여져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내용은 대부분의 일본 교과서에 비슷하게 실려있다. 또 일본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앞서 ‘칠지도’와 ‘임나일본부의 허구성’에서 밝혔듯이 이는 분명 정신이 황폐화된 일본이 조작하였던 것이다.

1907년 샤반느本

1900년 나이토本

1894년 사코本

이진희씨의 주장 외 다른 각도에서 일본주장의 허구성과 조작에 대한 의구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광개토태왕비가 발견된 시점은 일본 3류 사무라이들이 정한론을 외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칠지도’와 같이 각종자료를 수집,조작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2. 일본은 태왕비의 신묘년 기사가 바로

임나일본부의 결정적인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임나임본부의 허구성에서 밝혔듯이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 또는 안라일본부로 기재하는 등 일정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라는 글자가 서기 541년부터 554년까지의 13년간 만 존재하고 있다. 또 징구왕후에 대한 기록도 중국의 사서나 백제의 역사 등을 살펴볼 때 약 120여 년이나 차이가 나므로 일본의 주장은 시대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다.

3. 광개토태왕비는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록한 고구려역사 碑로써 主體는 분명 고구려 내지는 광개토태왕이다. 따라서 일본측 주장과 같이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를 격파……’등 왜가 주어가 되어 왜의 활약상이나 왜의 업적을 기록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광개토태왕은 신묘년에 즉위할 때 백제를 가장 주적(主賊)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371년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속국을 거부하고 3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 평양성까지 쳐들어와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구원(故國原)태왕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묘년기사뿐 만 아니라 영락6, 9년 외 비문 곳곳에서 신라와는 달리 백제를 百殘이라 미천하게 기록한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즉 고구려의 주적인 백제를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대로 일본서기에는 어디에도 百殘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 왜는 ‘구다라나이(百濟無り--백제가 최고다)’와 같은 말이 생길 정도로 백제로부터 많은 문물을 전수받는 백제의 후국으로 존경의 대상이었지 공격의 대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비문 곳곳에서 왜와 백제가 내통했다라는 문구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 논란이 되고 있는 신묘년조 바로 뒤에 이어지는 영락 6년 조에는 ‘이육년병신왕궁솔수군토벌잔국(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이라는 내용은 더욱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영락6년 광개토태왕이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잔국. 즉 백제를 공격했다는 뜻이며 그 뒤 기사에는 58성 700촌을 함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광개토태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섰다면 이것은 보통전쟁이 아니라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이 시기 고구려는 신라를 이미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몰아내고 백제의 북방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직접 수군을 동원하여 남쪽 백제의 중심부를 향하여 대대적인 정벌을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이 전투는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나고 백제왕은 광개토태왕에게 재물을 바치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한다. 따라서 비문에 따르면 백제를 복속시켰던 것은 왜가 아니라 고구려였던 것이다.

4. 신묘년기사를 제외하고 영락 9, 10, 14년 조에 왜가 나오는데 왜는 主 정복대상이 아니라 백제.신라.가야를 정복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부수적인 존재로 나타난다.이러한 것은 고구려군인이 아닌 관군(官兵)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관군이 나타나면 왜인들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므로 이 비에서는 왜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退. 追. 滅의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백제.신라 등과 같이 국가의 명칭이 없이 倭, 倭人, 倭寇, 倭賊 등 일정한 격식이 없는 표현은 왜가 당시 고정적인 성(城)이나 장기적으로 주둔하는 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마도 왜(對馬島倭), 규슈왜(九州倭), 야마토왜(大和倭) 등 지역적으로 분산 출몰하여 노략질을 하는 존재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신라.백제를 복속할 능력은 물론이고 항상 고구려로부터 당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는 일본서기가 조작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락 9년 조에는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通. 王巡下平壤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其忠誠, 特遣使還告以□□.’ 이를 해석하면 “영락 9년 기해(己亥年)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내통하였다……중략…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나라의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城池)를 파괴하니 노객(奴客 신라의 왕)이 백성을 위(爲)하여 왕에게 와서 도움(命)을 청합니다. ……중략…….곧 출병할 것임을 알리게 하였다.”라는 뜻이다.

이는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일본의 주장대로 신라가 왜의 속국이었다면 왜가 신라를 침공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또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후 고구려군은 신라의 성과 주변에 있던 왜는 물론 도망가는 왜를 가야지역까지 추격해 물리쳤다는 것은 일본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5. 일본서기와 태왕비가 조작되었다는 것은 경주에서 발굴된 왕릉급 호우총(壺杅塚)도 증명하고 있다.

1946년 경주시(慶州市) 노서동(路西洞)에서는 일본고고학자 有光敎一 입회 하에 왕릉급 고분이 조사.발굴되었다. 고분의 구조는 신라 지배세력의 전형적인 묘제인 돌무지 덧널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목관 안에서는 금동관.금제 관드리개.금제 귀걸이.유리구슬.목걸이.용문양이 새겨진 둥근 머리 장식 큰칼 등 수백 점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청동제 호우(壺杅) 1점이 포함돼 조사단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 호우는 뚜껑이 딸린 합(盒)으로 고구려에서 제사용 그릇으로 쓰였는데 호우총이라는 이름도 이 청동호우에서 따온 것이다. 이 청동 호우 밑바닥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글씨체는 중국 지안에 있는 광개토태왕 비문과 같고 '을묘년'이라는 연대는 광개토태왕 사후3년(415년.장수태왕 3년)을 의미하며 호우십은 만든 호우 열 개 중 1개라는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항아리는 광개토태왕을 기념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임을 말해주며 臣民인 신라왕에게 하사한 것이다. 신라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이 호우야 말로 신라가 왜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영향 밑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것이다. 이 호우총이 만약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발굴되었다면 일본은 분명 조작 내지는 은폐하였을 것이다.

6. 중국의 역사서를 살펴보면 진나라가 건국된 다음해인 266년에 히미코의 뒤를 이은 이요(壹與)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413년 왜5왕(五王)이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간까지 약 150여 년에 걸쳐 왜는 중국의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이를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주장하듯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할 정도로 강성했다면 150년 동안이나 중국역사서에서 사라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백제가 일본 문화의 시조라고 하는 왕인박사와 아직기 등을 파견하여 일본열도에 백제열풍을 형성하면서 영향력을 강화하던 시기 즉 백제가 일본열도에 후국을 형성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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