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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조작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탄생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작된 일본서기에서 조작된 징구왕후기를 근거로 출발한다. 이에 ‘임나일본부’라는 단어에 역사적 사실을 화려하게 재조작되어 되살아난 시기는 일본의 근대화 시작이라는 메이지 시대이다.

프랑스 학자 어네스트 레넌이 "역사 조작은 근대국가가 되는 필수적 요소"라고 했던가. 메이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3류 사무라이들은 레넌의 주장에 충실했다. 이들이 일으킨 정변에 대한 모순을 숨기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반대세력의 칼끝을 외부로 돌리기 위하여 역사조작과 정한론을 부르짖기 시작한다. 이들은 정한론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조작된 일본서기를 비롯한 고대역사서를 샅샅이 뒤지어 마침내 ‘임나일본부’라는 단어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임나일본부’를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게끔 조작한 것이다. 즉 이들이 조작한 ‘임나일본부’란 “고대 일본의 야마토정권 신공왕후가 한반도 신라. 가야. 백제를 정벌하고 조선총독부와 같은 통치기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지배 했다. 이 기구는 562년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여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라는 것이 기본 골격이다.

이들은 임나일본부를 화려하게 단장하고 측면 지원하기 위하여 세계적인 보물 ‘칠지도’와 ‘광개토태왕비’를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조작하여 쓰레기와 같은 유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 이들은 ‘칠지도’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송나라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왜5왕에 대한 칭호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王)가 이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국민들을 속였다. 또 고대 일본열도가 한반도의 속국이었음을 증명하는 수십만 권의 고대역사서를 불태워버렸다.

이렇게 되자 우매한 일본국민들은 진실된 역사에 눈멀게 되었고, 수천 년 한일역사는 일거에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들 3류 사무라이들은 일본국민들을 임나일본부 밑에 모이게 하여 임나일본부 옴진리교 환자로 만들어 놓았다. 역사조작으로 역사치매에 걸린 일본인들은 그들의 고향을 상실하게 되자 살인의 화신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근대 한일역사와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있어 엄청난 유.무형의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시대 위정자와 학자들이 만든 이러한 고대사상은 지금까지 일본인들의 가슴속 깊이 자리잡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지금도 일본국민=세계 최고, 한국=4등 국민으로 착각하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은 한국학자들은 물론 일본학자들에 의해 조작된 허구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일본역사교과서는 허황된 내용을 아직도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일본국가에 굶주린’ 우익들은 그들만의 우월주의에 이용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철제마갑

1. 황국사관에 물든 일본학자들은 임나일본부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칠지도’,’광개토태왕비’ 그리고 중국에서 하사 받은 왜5왕의 칭호라고 했다. 그러나 그 허구성에 대하여 칠지도와 광태토태왕비는 독립된 카타고리에서 다루었고, 왜5왕에 대한 칭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열도는 ‘수수께끼의 4세기’를 지나 왜 5왕(산讚, 친珍, 세이濟, 고興, 부武)은 413년 시작으로 502년에 걸쳐 중국에 조공을 하여 책봉관계 유지 및 칭호를 수여 받았다. 478년 왜 5왕 중 부(武)가 조공의 대가로 송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칭호는 다음과 같다.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王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당시 진한 모한이다. 모한은 변한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 진한 모한은 이미 신라와 백제에 의거 흡수된 나라들이다. 그리고 마치 왜가 신라와 가라 등 군사적 지배를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 중국 왕조가 조공을 받으며 책봉관계를 유지했던 나라들에 내린 칭호을 검토했던 사카모토 요시타네(坂元義種)의 연구에 의하면 반드시 군사적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신왕조 성립을 기념했던 축하용으로 칭호의 단계도 년도에 따라 달랐다. 이 시기 중국 왕조와 교류하지 않았던 신라를 제외하더라도, 왜 왕이 479년에 받았던 진동대장군의 칭호는 백제는 이미 420년에 받았다.                                                                         (장군 칭호 비교 사카모토 요시타네(왜5왕)참조

  

동진

동진

표기대장군                   

고구려

  
표기장군                     
거기대장군             

고구려

         
거기장군                      
정동대장군   

    

고구려

   

    

 

   

   

백제

정동장군   

고구려

    

   

 

 

 

 

진동대장군   

 

백제

 

 

 

     
진동장군

백제

                  
안동대장군     

    

   

        
안동장군      

          
장군호 연도

372

413

420

438

451

463

479

480

502

따라서 칠지도와 광개토태왕비문에 이어 왜5왕의 칭호 역시 한반도에 대한 왜국의 패권도 ‘임나일본부’의 존재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왜가 백제보다 낮은 단계의 국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 ‘천황’이라고 천자를 사칭한 일본서기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2.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 이외에 어떠한 역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라는 단어는 29대 킨메이(欽明) 일왕 시절 541년부터 554년까지의 기록에만 존재하고 있다. 신공왕후 기록은 ‘일본서기 조작’항에서 조작으로 얼룩진 허황된 내용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조작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본서기에서 그녀는 서기 247년경 사망한 여인이다. 또 일본이 주장하는 광개토태왕비의 기록은 서기 369년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사건의 년대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3. 일본은 신라가 가야를 정복함으로써 562년 임나일본부가 없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뒤 주장이 전혀 맞지 않는다. 즉 고대 일본이 신라.가야.백제를 지배했다면 신라가 가야를 병합을 하던 말던 신라를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 임나일본부가 없어질 이유가 없다.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신라가 멸하여 고려로 바뀔 때까지 지속되어야 마땅하다.

4. ‘일본서기 조작’에서 밝혔듯이 일본열도에서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철제마갑


‘일본’이라는 단어가 생성된 것은 7세기 후반 백제가 신라에 패망하여 일본열도로 이주를 하던 670년경이다. 7세기 이전 일본열도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고 각 지역별로 달리 불리는 부족국가 왜(倭)였다. 때문에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은 일본이 임나를 지배했다든지 사신부라든지 의미를 떠나 굳이 정확한 명칭으로 하자면 ‘임나왜부(任那倭府)’로 불러야 마땅하다. 따라서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자가 갖다 붙인 즉 조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5. 징구 62년(임오) 기록에 의하면 왜는 사치히코(沙至比궤)를 파견해 신라를 치려고 했지만 신라의 미녀 두 명에게 유혹당하여 실패했다. 사치히코는 그 뒤 ‘가라국’을 공격해 멸망시켰다고 한다. 이에 가라국 왕은 백제에 응원을 요청했고, 목라근자가 파견돼 가라의 사직을 회복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야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왜가 어째서 또 가야를 공격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6.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 뿐만 아니라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도 보인다. 이는 여러 곳에 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일본열도가 필요에 따라 한반도 가야지역에 파견한 외교 사신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통치기관과 거리가 멀다. 524년 신라가 가야를 공격해 오자 위기에 빠진 가야는 일본에 요청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왜는 군대를 파견하려 했다. 하지만 527년 쓰쿠시(築紫)의, 이와이(盤井)가 반란을 일으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와이의 반란 배후에 신라가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한다. 529년 이와이의 난을 진압한 왜는 오미노 케누(近江毛野)를 장군으로 삼아 안라국에 주둔했다. 이때 안라는 백제에도 출병을 요청했기 때문에 백제군도 주둔했다. 532년 금관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었다. 그러자 541,544년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는 ‘임나부흥회의’가 열렸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주도권은 백제가 가지고 있었지 일본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부라는 단어가 이 당시에 나타나고 있다.



7.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일본서기 필사본에는 임나일본부라는 글자 옆에 ‘어사지(御事持)’라는 토가 붙어있다. 어사지란 고대일본의 사신을 의미한다. 또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교수의 지적대로 다른 부분에선 임나일본부 옆에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회성 사신을 의미하는 ‘미코토모치(府)’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일본서기 킨메이(欽明) 15년 2월 조에 임나일본부 뒤편에는 ‘재안라제왜신(在安羅諸倭臣)’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안라 즉 아라가야에 파견된 왜국의 사신이라 분명히 호칭하고 있다. 또 여기에는 여러 명의 사신이 나오는데 그 중 吉備臣(길비는 일본열도 길비에 정착한 가야 사람들의 성), 河內直(하내 지금의 오사카에 정착한 사람들의 성)이라는 사신은 일본열도로 이주한 가야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통치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8. 일본서기 29대 킨메이(欽明) 條에 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1) 킨메이(欽明) 2년 7월에는 ‘일본부 하내직이 왜와는 별도로 신라와 통했다.’
2) 킨메이(欽明) 5년 2월에는 ‘일본부는 안라에 대한 왜의 계획을 백제.신라에 가서 들었다.’
3) 킨메이(欽明) 5년 3월에는 ‘일본부는 안라를 아버지로 삼아 오직 그들만을 따른다’
4) 킨메이(欽明) 9년 4월에는 ‘일본부가 안라를 위해 고구려와 내통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부가 왜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안라국왕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일본서기 조작’에서 밝혔듯이 야마토왜가 백제의 속국이었고 신공왕후가 지배하는 야마타이왜가 가야의 후국 또는 속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6세기 중반 왜국이 사신을 가야에 파견하여 고구려와 내통하게 된 것은 바로 신라가 낙동강을 건너서 서진해 오고 백제가 섬진강을 건너 서쪽에서 안라.가야국을 향해 동진해 오고 있는 긴박한 이때 안라국은 독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이때 가야인들의 속국이었던 왜가 가야를 돕기 위하여 파견한 사신인 것이다. 왜가 가야를 위한 이러한 외교적 노력 이면에는 바로 가야의 풍부한 철을 염두에 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9. 또한 200년 간이나 삼한를 지배했다면 이 지역에서 일본식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나 일본식 유물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단 한 점의 일본식 유물이 출토되지 않고 있다. 1917년경 일제는 일본서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한반도 고대사를 수거하여 분서를 감행하고 있을 즈음 임나일본부를 규명하기 위하여 일본을 대표하는 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하마다 코사쿠(濱田耕策), 이마니시 류(今西龍), 야츠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 역사학자들을 총동원하여 김해. 창녕. 함안 등 고대 가야지역 일대 고분을 샅샅이 파헤쳤다고 한다. 여기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증거물이 한 점도 발견되지 않자 야츠이는 1918년 10여 고분을 보고서도 없는 난폭한 발굴을 하여 철도 화차 두량 분의 유물을 도굴하여 일본으로 가져 갔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6세기중엽까지 약700년 간 자체 발전한 가야적인 성격의 유물들만이 지속되고 있어 가야가 독립된 국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10. 결론적으로 말하면 ‘임나일본부’는 통치기관이 아니다. 가야국에서 생산되는 철의 안정적인 수입처 확보를 염두에 둔 가야국의 속국인 야마타이왜 또는 기타 여러왜국의 외교사절단 혹은 무역대표부 정도의 기관이다. 오사카시 능남정(陵南町)에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가 있다. 이 신사는 원래 가라쿠니신사(韓國神社)였으나 메이지 시절 강제 개칭 당한 곳으로 가야가 멸망하자 가야인들이 많이 사는 이곳에 ‘가야를 기리기 위하여 신사를 창건했다’라고 안내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가야는 왜에 있어 경외의 대상이었지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는 조작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가야는 철의 왕국이다

고대국가의 우열은 바로 철기문화에 있었다. 당시 철은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고대국가들에 있어 철정(鐵鋌.덩이쇠)은 화폐 기능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부와 권력을 상징했으며 농기구.무기.말투구.말갑옷 등을 만드는 강력한 필수품이었다.

그리고 가야지역 왕릉급 무덤에서 예외없이 발견되듯이 권력의 상징인 부장품으로도 사용되었다. 가야는 동아시아국가들 중 철을 가장 많이 생산한 ‘철의 왕국’이었다. 옛 가야지역인 함안. 창녕. 곡성. 김해 등 곳곳에서는 철 생산지가 산재해 있고 가야의 수도 ‘金海’란 철이 바다를 이룬다는 뜻으로 철 생산이 많이 되었음을 뜻하고 있다.

 또 가야지역 마갑총에서 출토된 거대한 철제말갑옷은 당시 가야가 철이 풍부하고 문화가 굉장히 발달돼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실제 한반도에서 출토된 철제갑옷은 70여 개로 그 중 90%가 가야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당시 가야가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반도에서 백제.신라와 함께 정치적으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3세기 경의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조에서는 ‘가야지역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규슈대학 나시다시 다다시교수 외 많은 일본학자들은 5세기까지 일본열도는 철을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시절 일본에서는 철을 만들 수 없어 가야철이 절실히 필요했으며 철 원료를 수입해서 철기를 만들었다. 그런 영향으로 가야지역에서는 4세기에 집중적으로 철갑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으나 일본열도에서는 가야보다 100년 가량 늦은 5세기 이후의 철제품들이 다량으로 나타난다. 나라현 가시하라박물관이나 기타규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10여 개의 철갑옷과 투구들이 5세기 이후 제품들로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쌍둥이처럼 비슷하여 가야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 철제품의 원료인 덩이쇠를 수입해 철제품을 만든 흔적이 유물 출토로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가야로부터 철과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입되면서 일본열도에는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다. 나라, 오사카, 아스카지역을 중심으로 중앙집권국가가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일본인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철 수입 이전의 일본토기는 붉은빛에 투박한 모양을 한 하지키(土師器)라는 토기였다. 그러나 5세기 이후 일본의 토기는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지는 스에키(須惠器)라는 토기로 완전히 바뀌었다. 회색 빛의 스에키토기는 쇠처럼 단단하고 두드리면 쇠 소리가 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스에키토기는 가야 도공들이 집단적인 이주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가야토기와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닮았다"고 아스카 국립박물관장은 말하고 있다.

일본학자들의 견해
앞서 밝혔듯이 일본서기에서 신공왕후에 대한 기술(記述)이 3류 소설과 같이 허황되게 조작된 내용이지만 신공왕후가 삼한 정벌을 위해 출발했다는 규슈의 오이타현 우사(宇佐)신궁 등 일본 전역 4만여 신사는 신공왕후의 삼한 정복 과정을 그림으로 빼곡하게 그리어 임나일본부설을 정설처럼 선전하고 있다. 최근엔 임나일본부 맹신의 대표자로 야키 소시(八木莊司)가 꼽히고 있다. 그는 우익계열인 산케이신문(産經新聞)에 다년간 연재한 '고대로부터의 전언(傳言)'에서 임나일본부 설치를 기정사실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는 허구라는 것이 다수설이다.

1. 마쓰마에 다케시(松前健) “신공왕후는 실존 인물이 아니며 삼국을 정벌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허구다. 신라계 집단촌에 사는 ‘오가나가 다라시히메’라는 여성의 이름을 도용하여 신공왕후로 둔갑시켰으며, 그녀의 아들이라는 오오진왕은 규슈의 가야계인 구야국으로 불렸던 부족국의 왕이었음에도 이를 일본인으로 대치시켜 놓고는 침략사로 꾸민 허구”라고 주장했다.

2.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교수는 “일본부에서 일본이라는 단어는 7세기 후반에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와후(倭府) 혹은 야마토의 미코토모치(府)라고 부르는 것을 일본서기가 만들어진 8세기경의 일본부라고 부른 것이다.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인간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조직이나 야마토 정권이 임나를 지배하는 그런 조직은 아니다. 지금 식으로 보면 외교사절, 혹은 외교활동을 한 사람들이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일본 내에서도 극소수다. 가야와 일본간에 인적.물적 교류는 있었지만 일본이 한반도에서 군사거점을 두고 지배했다는 증거는 없다. 임나일본부는 경남 함안지방의 아라가야에 있었던 '왜(倭)계 가야인' 의 집단으로 보인다. 이들은 당시 복잡한 국제정세에서 외교력은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나일본부는 일본학계에서 이미 극복한 내용(허구)이다.”

3. 쓰다 소기치(津田佐右吉)는 “신공왕후의 삼한 정복설은 가공이며 괴이한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또 국내 학자들은 물론이고 우케다 마사유키(請田正幸)• 오쿠다 쇼우(奧田尙)• 키토우 키요아키(鬼頭淸明) 등 최근 많은 일본학자들은 이와 같은 학설에 동조하고 있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4세기 철제갑옷

   ▲나라현 가시하라박물관소장 5세기 철제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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